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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후기 비제이뱃 덧글 0 | 조회 345 | 2023-11-22 00:08:11
이필창  

나를 꽉 껴안은 라체스의 팔이 떨렸다.

마치 두려웠던 아이처럼.

떨리는 숨소리와 요동치는 심장이 귓가에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의 등을 다독거리며 귓가에 잘근 속삭였다.

“오늘은 우리의 새로운 날이니까요.”

내가 죽고 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라체스는 항상 회귀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난 후 나처럼 바로 회귀하면 좋으련만 그의 시간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죽고, 내 장례식이 열리고 그렇게 또 회귀할 게 뻔한 인고의 시간 속에서 라체스는 항상 홀로 버텼다.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어차피 결국 사라질 세계 속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어떤 심경으로 보냈을까.

그건 오직 당신과 나만이 아는 고통이고, 우리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절망이었다.

나는 무너지듯 안기는 라체스를 안아주며 기사들한테 물러가라고 손을 저었다.

니리엘 가의 기사들은 절망으로 무너지는 라체스를 보며 놀랐는지 입을 떡 벌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정신을 차린 이레인 경이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인 후 침실의 문을 닫아주었다.

쿵.

침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침대로 이끌었다.

라체스가 별다른 반항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스르르 따라왔다.

“언제쯤 일어났어요? 잠은 잘 잔 거예요?”

라체스를 침대에 털썩 앉혀두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모르겠어. 그냥, 그런 꿈을 꾸자마자 달려온 것 같은데…….”

몽롱한 표정의 라체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 끝이 내 볼에 툭 닿았다. 괴롭게 일그러졌던 표정이 그제야 서서히 펴졌다.

“우리 좀 자요.”

나는 볼에 닿은 라체스의 손을 붙잡고 그를 침대 위로 천천히 눕혔다.

그가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웠다. 나도 꼬물꼬물 옆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내 머리 무거워요? 무거워도, 팔 저려도 그냥 참아줘요.”

팔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있다면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웃으며 라체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새벽 공기를 두르고 날 찾아온 라체스의 몸이 서늘했다.

“내가…….”

한참 나를 바라보던 라체스가 현실감각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널 죽였어.”

말라비틀어져 갈라진 목소리가 떨렸다.

“꿈에서, 네가 죽어 있었는데…… 내 손에, 레페렌티아 네 피가 묻어 있었어.”

“전부 꿈이에요. 괜찮아요.”

“나는, 나는…….”

“라체스.”

그의 이름을 부르자 라체스가 입술을 꾹 닫았다.

나는 눈을 감고 혼란스러워하는 라체스의 메마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볼을 쓸었다.

“꿈이에요. 나는 지금 당신 앞에 있잖아요. 그렇죠?”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생의 나는 절대 죽지 않아요. 라체스, 당신이 날 지켜줄 거니까요. 그렇죠?”

그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전보다 또렷한 눈동자로.

“잠이 부족하고 최근에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래요.”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자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감겼다.

“옆에 계속 있을 테니까 자요.”

“……응.”

잠결에 몽롱한 목소리가 답했다. 곧 잠들었는지 내쉬는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라체스가 무사히 잠든 걸 확인한 후 나도 눈을 감았다.

두꺼운 암막 커튼 덕에 밖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우리한테 닿지 않았다.

***

시간이 흘렀다. 이레인 경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비앙카도 맡은 바를 열심히 해 주고 있었다.

이따금 데토르가 만나자고 편지를 보내긴 했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오늘은 성대한 황실 파티가 열렸다.

이렇게 큰 파티에 정식으로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떨렸다. 게다가 라체스와의 약혼식 이후로 처음이라 더 설레기도 하고 말이다.

“라체스 비올렌투스 공작님 입장하십니다! 레페렌티아 니리엘 아가씨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와아.’

델리아의 약혼식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알 법한 권세가 등등한 명문가들이 가득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차갑고 이성적인 눈동자가 우리를 훑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괜찮아.”

저 많은 시선을 맞서고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라체스가 웃었다.

“이 안에서 네가 고개를 숙일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저는 아직 비올렌투스 공작부인도 아닌걸요.”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다들 생각할 테니까.”

문득 델리아의 약혼식에 참석했을 때, 라체스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지금 누구 옆을 걷는지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마, 레페렌티아.’

내가 주눅 들고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추면 내 옆에 선 라체스 역시 그렇게 얕잡아 보이겠지.

제국 그 누구한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저 남자를 말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주눅 들었던 어깨를 펴고 턱을 살짝 당겨 고개를 들었다.

한쪽에서 영애들과 함께 대화 중이던 델리아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델리아가 흠칫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델리아는 샴페인을 쥔 채 나를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설마하니 내가 파티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맞은편에는 비제이뱃 마찬가지로 많은 영애와 대화 중이던 비앙카가 보였다.

비앙카가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되게 안심이 되네.’

이렇게 큰 파티는 처음이라 괜스레 긴장이 앞섰다.

“제국의 수호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새벽,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늘 이 파티의 주최자, 황좌에 앉은 황제를 향해 우리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심드렁하게 턱을 괴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흡족하게 웃으며 우리를 내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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